이철 (19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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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철(1903년)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음악가이자 기업가이다.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한 후 영화관 악사로 일하며 음반 도매상과 백장미사를 경영했다. 현송자와의 불륜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나, 이후 현송자와 재혼하여 오케레코드를 설립하고 조선악극단을 운영하며 대중음악 발전에 기여했다. 고복수, 손목인, 이난영 등 많은 음악인을 발굴했지만, 일제강점기 말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 생애
2. 1. 불우한 유년 시절과 음악과의 만남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한 이철은 1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친척 아저씨뻘 되는 이인규(李寅奎)의 양자가 되었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한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으나 양아버지 이인규의 전폭적인 후원 하에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다니다가 윤심덕[1]과 만나 친해졌고, 이어 나중에 자신의 매부가 된 김성흠을 만났다. 두 사람은 연희전문 악대부에서 함께 활동했으며, 이철은 악대부의 리더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연희전문을 중퇴한 뒤 악기를 다루는 취미를 살려 1924년부터는 영화관에서 색소폰과 트럼펫을 연주하는 악사로 근무했다.
그는 악사로 일하면서 음악 서적을 전문적으로 발행하는 백장미사를 경영하기도 했고, 부인과 함께 음반 도매상을 운영했다. 이철의 부인은 배정자의 첫 남편 현영운의 차녀인 현송자이다.
2. 2. 현송자와의 만남과 불륜 스캔들
현영운의 딸 현송자는 대한제국 당시 학부 학무국장을 지낸 윤치오의 후처로 출가했으나, 이철과의 불륜으로 이혼당한 뒤 교회에서 쫓겨났다.[2]
이철은 연희전문학교 입학 직전에 같은 교회 신도로 현송자를 처음 만났다. 현송자는 대한제국 고위 관료의 딸이자, 마지막 황제 순종의 황후를 배출한 사회적 영향력이 상당했던 윤씨 일족의 부인이었고, 빼어난 미모와 일본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당시 사교계 유명 인사이기도 했다.[2]
4년 연상에 남편까지 있는 현송자와 이철이 서로 교우가 아닌 이성으로 느끼게 된 과정은 세세히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의 은밀한 사랑은 1930년 들어 결국 세간에 알려지고 말았다.[2] 이철과 현송자는 모두 교회와 학교에서 쫓겨나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았다.[2]
그러나 현송자는 트로이카 라는 술집을 운영하다가[3] 이철과 재혼한다. 이후 새 남편이 된 이철의 음악 사업을 적극 도왔다. 현송자는 이철이 그동안 쌓아온 음악 관련 경력을 고려해, 일본 유학 시절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그가 음반회사 지점을 운영할 수 있도록 주선했고, 그 결과 이철의 오케레코드가 1933년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2]
2. 3. 오케레코드 설립과 성공
이철은 1930년대에 경성부에서 음반제작사 오케레코드를 설립하였다. 오케레코드는 일본의 제국축음기상회와 관련을 맺었지만, 한국인이 세우고 독자적으로 운영한 최초의 음반회사로 평가받는다.[4] 김성흠도 오케레코드에 기술적인 도움을 주었다.[5]
이철은 음반 발매 외에도 전속 예술인들을 공연에 활용할 수 있도록 조선악극단을 설립, 운영하여 한국 대중예술사 초창기에 연예 매니지먼트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복수, 손목인, 이난영, 김정구, 남인수, 이화자, 장세정, 이인권, 조명암 등 수많은 인기 가수와 작곡가, 작사가들이 그에 의해 발굴되었다. 1935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로 신드롬을 일으키는 등 탁월한 흥행 감각으로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2. 4. 친일 행적과 몰락
1936년에 오케레코드의 본사인 일본의 제국축음기주식회사가 이철의 지사장 직위를 박탈하고 문예부장으로 강등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음반 제작에서 손을 뗀 뒤 오케그랜드쇼단, 조선악극단, 신생악단 등을 운영하며 공연단 운영에 전념하였다.[6]
일제 강점기 말기에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해 가요계가 전시가요를 부르고 공연하면서 친일 활동을 했을 때, 오케레코드의 인기 가수들이 포함된 이철의 악단도 조선과 만주, 상하이 등지를 순회하며 인기를 끌었다.[6]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조직한 이동극단 제2대 대표를 맡기도 했다.[6] 1944년에 만주 공연 중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했다가 사망했다.[6]
3.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
3. 1. 오케레코드
3. 2. 조선악극단
1936년에 오케레코드의 본사인 일본의 제국축음기주식회사가 이철의 지사장 직위를 박탈하고 문예부장으로 강등시켰다.[6] 이 일을 계기로 음반 제작에서 손을 뗀 뒤 오케그랜드쇼단, 조선악극단, 신생악단 등을 운영하며 공연단 운영에 전념하였다.[6]
일제 강점기 말기에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해 가요계가 전시가요를 부르고 공연하면서 친일 활동을 했을 때, 오케레코드의 인기 가수들이 포함된 이철의 악단도 조선과 만주, 상하이 등지를 순회하며 인기를 끌었다.[6] 친일 연극과 공연의 지방순회를 위해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조직한 이동극단 제2대 대표를 맡기도 했다.[6] 1944년에 만주 공연 중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했다가 사망했다.[6]
4. 친일 논란과 역사적 평가
4. 1. 친일 행적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4. 2. 상반된 평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5. 가족 관계
참조
[1]
문서
사의 찬미
[2]
간행물
조선 가요계를 풍미한 마이더스의 손, 이철
보보담
[3]
웹사이트
야화(夜話), 한숨지는 공작(孔雀)들
http://moderncafe.cu[...]
[4]
웹인용
레코드판
http://www.emuseum.g[...]
대한민국 문화관공부 e뮤지엄
2008-07-09
[5]
뉴스
“2002 한·일 월드컵이 교포-日사회 융합 길 터줘” - 전국체전 50년 ‘개근’ 김영재 在日대한체육회 상임고문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7-04-07
[6]
학술
조선연극문화협회의 활동을 통해서 본 친일 연극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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